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샤르 알아사드 (문단 편집) === 대통령 집권과 정책 전반 === >만약 사회의 운영이 하나의 종교, 하나의 정당, 혹은 하나의 그룹에 편중된다면, 그 사회에는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시민, 시민 한사람 한사람에게 사회의 발전과 근대화에 나서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세가지 사항이 중요합니다. 우선, 모든 과제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현실에 걸맞지 않는 낡은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생각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존의 생각을 개선하는 것입니다. (중략) > >이를 위해 다음의 여러가지 측면이 필요로 해집니다. 창조적인 사고, 건설적인 비판, 설명 책임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중략) > >'''정치제도의 개혁을 위해서는 민주적인 사고방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투명성이 요구됩니다. 국가가 개인을, 개인이 국가를 존중하기 위해서 우리는 법의 지배를 지켜야만 합니다. 법의 지배가 우리의 자유를 지켜줍니다. 낭비와 부패에 대해서도 싸워야 합니다. 행정개혁은 더이상 기다릴 수 없는 과제입니다. 무책임하고 부패하며 악한 짓을 행하는 것은 법의 단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현 상황에 안주하는 것을 더이상 용납할 수 없습니다. 바샤르 알 아사드는 2000년 7월 취임연설에서 국민의 광범위한 정치적 참여와 민주주의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연설을 했고 국민들은 처음에는 이를 당혹스러워했다. 하페즈 알 아사드 시대에는 그런 것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체포되고 고문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새로운 사회분위기를 자각하고 다마스쿠스의 지식인 99명이 치안유지법의 철폐와 민주화 개혁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아사드가 대통령이 됐을 때 시리아인들은 그를 ‘희망’이라고 불렀다. 아버지의 억압적인 통치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였다. 아사드는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하며, 컴퓨터와 정보통신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취임 후에는 정치범을 석방하고 국영기업의 민영화와 경제 개혁을 추진했던 것 때문이었다. 바샤르는 시리아컴퓨터협회 회장직을 맡아 시리아에 인터넷과 휴대폰을 도입하고 각급 학교에 컴퓨터를 보급하는 등 이른바 ‘현대화의 기수’로 행세하는 한편, 아버지의 오랜 측근이었던 마르무드 알 조흐비 총리를 숙청하는 등 대대적인 반부패 캠페인도 전개했다. 하지만 정치개혁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미 바샤르의 온건노선에 대항하는 바트당 보수파들이 있기도 했지만 2001년 9/11 테러로 인하여 미국의 시리아에 대한 태도가 극도로 악화되었으며 아사드 정권을 전복시키겠다는 강경한 발언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일들로 인해 민주주의로의 시민 토론이 활발했던 "다마스쿠스의 봄"은 시민단체의 운동 방향이 반정부로 흘러가면서 건수를 잡은 당국에 의해 체포 및 수감되면서 무너지고 말았다. 또 이웃나라인 이라크가 침공당해 파멸하고 저항 세력이 준동하며 난민들이 계속해서 시리아로 밀려들어왔으며 미국의 요청으로 국경 통제에도 진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어 내부적인 치안첩보의 완화를 급격하게 추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이 완화되었다. 하페즈 알 아사드 시대에는 무카바라트라고 불리는 정보 치안당국의 가혹한 지배가 이루어졌고 시민 내부에 침투하여 감시했으며 의심이 가면 누구든지 영장 없이 연행되었고 고문도 자주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샤르 알 아사드 통치 초기에는 민주화 운동가나 반정부 인사와 같은 확신범이 아니라면 매우 유연해졌다. 외국 기업이나 기관에 근무할 경우 정기적으로 당국에 출두하여 허가증 기한 연장에 대한 절차와 보고를 하는 것이 의무화되어 있었으나 바샤르 시대부터는 형식적인 절차가 되었다. 또 밀고에 대해서도 강압적인 자세가 사라지고 무조건 입건부터 시키고 보는 것은 사라졌다. 알라위파만이 고위직에 오른다는 아사드 정권의 전통을 깨기도 했다. 자신이 오랫동안 회장을 맡았던 컴퓨터과학협회의 구성원들을 다수 활용함은 물론 하페즈 시대에는 다마스쿠스 대학 출신 학자만을 내각에 임명했는데 지역감정을 깨고 알레포 대학 출신 학자들을 임명하기도 했다. 구 바트당 위주의 인사에 대비되어 기술관료의 입지가 높아졌고 자유경제 전문가이고 비당원인 압둘라 다르다리가 경제부총리로 임명되었으며 계획경제 전문가인 아메르 루트피와 협력하여 시리아 경제체질 개혁을 이끌어 나가기도 했다. 수니파인 무함마드 오타리가 총리를 맡기도 했고, 특히 군부의 요직인 국방장관에 2011년 취임한 다우드 라지하는 기독교도, 정권의 기둥 치안정보기구(GSD)의 수장을 2005년부터 2010년까지 맡았고 2012년 7월에 재취임한 알리 마물루크는 수니파이다. 시리아 내전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공화국수비대 104공수여단장인 잇샴 자헤라딘 준장은 드루즈파이다. 아사드 가문 친인척이라고 해도 부정부패가 있으면 엄중히 처벌되었다. 레바논에서 활약하며 왕처럼 행동했던 가지 카나안은 바샤르의 냉대를 받고 권총 자살했으며 세관국장으로 광범위한 탈세를 해온 모친 계열의 일족 하산 마클루프는 2009년에 해임 및 체포되었다. 이러한 일족 처벌을 반대하고 하산 마클루프의 구명에 나선 숙부 자밀 아사드는 바샤르의 무시를 당하고 진노하여 둘의 관계는 오랫동안 소원해졌을 정도이다. 이러한 인사 조치들과 함께 알라위파에 대한 수니파 국민들의 증오는 상당히 누그러들었고 내전이 발발한 이후에도 수니파 60%가 아사드를 지지한 원동력 중 하나가 되고 있다. 경제 부문에 있어서의 개혁의 골자는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탈피와 자유경제 활성화였다. 이에 대한 바트당 보수파의 반대를 무릅쓰고 2000년 사립학교의 설립을 자유화했고,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유지하며 소매점 이상의 개인 상공업을 금지하는 법안을 완화하였으며 2005년 6월에는 바트당 보수파를 물리치고 당대회를 열어 자유경제정책을 골자로 하는 10차 5개년 계획을 통과시켰다. 이러한 개혁정책에 의해 관광업을 비롯한 민간 업종의 성장이 조금씩 이루어져 2006년 3.5%, 2007년 4.3%, 2008년 4.5%, 2009년 5.9%로 지속적인 상승을 기록했다. 한편 바샤르는 2007년 대선에 단독 출마해 97.6%의 득표로 재선됐는데, 투표장마다 정권의 친위대인 공화국 수비대원들이 깔려 있었고, 투표소 안에는 ‘찬성란에 동그라미를 치면 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2007년부터 심각한 가뭄과 이상기후로 인하여 시리아 인구 20%가 종사하는 농업이 큰 타격을 받았고, 상대적으로 상공업 위주의 경제정책을 펴던 시리아 정부는 농업을 소홀히 대하는 경향이 있어 대책도 미봉책 수준이었다. 이에 따라 파탄난 농촌경제를 뒤로 하고 도시로 상경하는 이촌향도 현상이 심화되어 결과적으로 실업률 증가로 이어졌다. 2011년 기후 정상화로 농업 생산량은 회복되기 시작했으나 이때는 시리아 전체가 난리가 났고 이후 내전으로 인해 시리아의 경제개혁은 완전히 주저앉아버린 상황이다. 2023년 9월 21일 [[항저우 아시안게임]] 개막식에 맞춰 초청 받아 항저우에 도착했다. 이후 중국 [[시진핑]] 주석과 만나 정상회담을 가졌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3/0012105815|#]][[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1421285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